진천장은 진천대교를 건너 백곡천 둔치 주변과 진천시장 동쪽 장터에서 열린다. 장날은 5일과 10일이며 장날이 되면 상인들은 물론 시골 할머니들이 산이나 들에서 직접 캐온 봄나물을 들고 찾아든다. 상인은 5백~6백명 정도로 상당히 큰 장이라 할 수 있다.조치원장과는 비슷하고 음성장보다는 크다 한다. 구경하는데 족히 2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다. 충청도의 특산물이라는올갱이(다슬기)도 볼 수 있다.가축시장에는 강아지며, 새끼오리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가축시장 옆의 잡곡시장에는 20여가지의 곡식 보따리가 펼쳐져 손님을 맞이한다. 장터 한쪽면으로는 순대국밥의 먹을거리가 죽 늘어서 있다.진천장은 시골 장터의 풍경들이 많이 보인다. 동창회 모임인 양 할아버지들이 한쪽에 모여 앉아 시끌시끌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모습, 약장수의 만병통치약 선전에 귀를 쫑긋 기울이는 사람들, 할머니들이 캐온 봄나물을 앞에 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옆 할머니와 인생살이 얘기를 하는 모습, 뻥튀기 아저씨의 ‘뻥’하는 소리들이 옛 시골장의 흥을 돋구어 준 다.※ 시장유래 - 진천읍 일원 도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부터 전래된 5일장의 명맥을 이어오던 중 1976년부지내에 장옥 등을 건축하여 노점상을 유도하고, 농수산물거래 및 생필품구매장으로 활용
단일 시장으로 동양 최대 규모인 동대문종합시장 내에 위치한 한복매장은 우리나라 전통 한복매장으로써도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하며, 한복에 대한 모든 물품의 집결지 이자 유통지 이다. 원단에서 전통 한복에 기능성을 추가한 개량한복, 그리고 여러 엑세서리와 부자재들 까지 모든것을 한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에 한국 관광에 최고의 기념품 구입점이자 한국 전통을 느껴 볼 수 있는 학습장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영조(英祖)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동에 이거하면서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 대문은 솟을 대문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크고 화려한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는 곳이다. 우측에 작은 사랑이 있고그 뒤로 안채가 있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ㅁ자형을이루고 있으며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다.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있으며,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음성과 청주, 괴산이 둘러싸고 있는 충청북도 증평군에는 장뜰시장이 있다.
장뜰시장은 늘 문을 여는 상설시장이지만 1일과 6일 장이 서는 날이면 더욱 활기차게 변신한다. 증평시장은 고려시대엔 청당현과 도안현에 해당됐으며 이후 조선시대에는 청안현과 청안군이었다.
1914년 청안군은 일제에 의해 청원, 진천 그리고 괴산으로 각각 쪼개 나뉘어 편입됐고 이후 증평지역은 1923년 5월 1일 청주간 증평의 충북선이 개통되므로써 발전의 전기를 맞이해 상설시장과 5일장(1일, 6일) 등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음성, 괴산, 진천, 청원의 4개군의 접경지에 위치한 증평시장은 급격히 성장해 1949년 8월13일 증평읍으로 승격됐고, 1963년부터는 증평지역을 독립군(郡)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민간운동이 시작됐으며, 2003년 자치군 승격이후 현재에도 증평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증평역에서 가까운 이 자리는 ‘장이 선다’ 하여 ‘장뜰’로 불렸고, 장터 이름도 장뜰시장이 되었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재래시장인 셈이다. 200m 남짓한 거리를 한 줄로 연결한 것이 시장통의 전부이지만, 노점을 포함해 100여 곳의 상점이 있고, 장날이면 집에서 가지고 나온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까지 더해져 시장통이 꽉 찬다.증평대장간은 사라져가는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뜰시장의 명소다. 1974년 문을 연 이래 쇠 녹이는 화덕에 불 꺼진 날이 없다. 대장간 주인장 최용진 선생은 쇠를 다루는 일이 제일 쉽다고 말하는 타고난 대장장이다. 열여섯 살 때 대장간 심부름꾼으로 일을 시작해 ‘남들이 호미 150개 만들 때 자신은 500개를 만들어내며’ 망치질에 전념했다. 전국의 대장간들이 사라지고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바뀔 때도 묵묵히 한자리를 지켰다. 대장간 부문에서 전국 최초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충청북도 향토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이 분야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명인이다.
1523년(중종 18)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과 명륜당·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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